CA 라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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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A 라누스는 1915년에 창단된 아르헨티나의 축구 클럽으로,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1931년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처음 참가했으며, 2007년 아페르투라에서 첫 우승을, 2016년에는 두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1996년 코파 CONMEBOL, 2013년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우승하며 국제 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라누스는 CA 반피엘드를 라이벌로 하는 클라시코 델 수르 경기로 유명하며, 농구팀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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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창단된 아르헨티나 축구 클럽 CA 리버 플레이트는 "로스 밀리오나리오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프리메라 디비시온 최다 우승,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라 마키나" 시대, 2부 리그 강등 후 부활, 보카 주니어스와의 수페르클라시코 등으로 유명하고 축구 외 다양한 종목 팀을 운영한다.
CA 라누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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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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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네임 | 클럽 아틀레티코 라누스 |
별칭 | 그라나테 (진홍색) |
창립일 | 1915년 1월 3일 |
경기장 | 에스타디오 시우다드 데 라누스 |
수용 인원 | 47,027명 |
회장 | 루이스 마리아 체벨 |
감독 | 마우리시오 펠레그리노 |
웹사이트 | clublanus.com |
현재 시즌 정보 | |
리그 | 프리메라 디비시온 |
시즌 | 2024 |
순위 | 14위 |
유니폼 정보 | |
홈 유니폼 색상 | 진홍색 |
원정 유니폼 색상 | 하얀색 |
2. 역사
CA 라누스는 1915년에 창단되어 1931년 프리메라 디비시온(1부 리그)에 처음 참가했다.[6] 1949년 CA 우라칸과의 잔류 경쟁에서 논란 끝에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14] 1956년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처음으로 준우승을 기록했다.
1978년 약 200만달러의 빚으로 역사상 최대 경영 위기를 맞았으나, 소시오(클럽 회원)들의 지원으로 빚을 갚고 2부 리그로 복귀했다. 당시 소시오 수는 2000명에 불과했지만 1981년에는 1만 명이 넘었다.[13] 1990년, 12년 만에 프리메라 디비시온으로 복귀했다.[13]
1995년 국제 대회에 처음 참가했다. 1996년 코파 CONMEBOL에서 우승하며 클럽 역사상 첫 국제 대회 타이틀을 획득했고,[19] 1997년에는 같은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1998년과 2006년에는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준우승했다. 2007년 12월, 아페르투라 2007-08에서 창단 92년 만에 프리메라 디비시온 첫 우승을 달성했다.[20]
2. 1. 창단과 초기 (1915-1930)
1897년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챔피언십에 참가했던 라누스 애슬레틱 클럽과[4][5] 1913년과 1914년 반체제 아르헨티나 축구 연맹에서 주최한 코파 데 콤페텐시아에 참가한 라누스 유나이티드(현 클루브 아틀레티코 라누스의 전신)가 있었다.
1915년 1월 3일,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던 라누스 유나이티드와 클루브 엘 프로그레소의 합병을 통해 새로운 구단이 설립되었다. 미겔 우사레이가 구단 역사상 최초의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15년 1월 27일에 열린 총회에서 "클루브 아틀레티코 라누스"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6]
클럽은 당시 디비시온 인터미디아 (당시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 시스템의 2부 리그)에서 마르가리타 빌드와 헤네랄 데에사 거리에 위치한 라누스 유나이티드 옛 경기장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1919년, 클럽은 아르헨티노 데 킬메스를 꺾고 최고 리그인 프리메라 디비시온으로 승격했다. 1부 리그에서 라누스는 공식 협회에서 첫 경기를 치른 후, 1920년 8월 8일 팀이 라싱 클럽에 1-0으로 패하며 반란 아소시아시온 아마추어 데 풋볼 (AAmF)로 전환했다. 1부 리그에서의 첫 시즌, 라누스는 20개 팀 중 11위를 기록했다.[7]

그 후 몇 년 동안 라누스는 프리메라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못했으며, 1923년에는 최하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 시즌, 팀은 20경기 중 단 2승만을 거두고 14번 패했다. 1926년 라누스는 6위를 기록했고, 1927년 시즌에는 산 로렌소 데 알마그로와 보카 주니어스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라누스는 33경기를 치러 22승을 거두고 5번 패하며 50점을 획득했다.[8]
1929년 2월 24일, 라누스는 엑토르 기디와 헤네랄 아리아스 거리의 교차로에 새 경기장을 열었다. 당시 흔했던 나무 관람석이 있는 이 경기장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레이트 서던 철도 ("Ferrocarril del Sud")가 제공한 50000m2의 부지에 건설되었다. 당시 클럽 회장이었던 실비오 페리는 처음 몇 년 동안은 기관에 아무런 비용 없이 부지를 할당받도록 조치를 취했다. 1929년 3월 24일, 라누스는 플라텐세를 상대로 첫 경기를 치러 5-2로 승리했다.
2. 2. 프로화와 시련 (1931-1977)
1931년 아르헨티나에서 축구가 프로화되었다. 라누스는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두어 22점만을 얻어 챔피언인 보카 주니어스보다 28점 뒤진 꼴찌에서 두 번째로 낮은 순위로 시즌을 마쳤다. 1년 후, 클럽은 경기장에 새로운 관람석을 개장했다. 도밍고 일벤토(음악)와 다니엘 카오(가사)가 작곡한 라누스 국가의 첫 번째 버전도 발표되었다.1933년 창립 멤버인 미겔 이구즈기사는 호세 C. 파스 거리(현재의 9 데 훌리오 거리)에 새로운 본부를 건설할 부지를 확보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이는 12월 23일에 열린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1년 후, 협회는 클럽 라누스와 라이벌 팀인 탈레레스 데 레메디오스 데 에스칼라다에 "유니온 탈레레스-라누스"라는 이름으로 토너먼트에 참여하도록 강요했으며,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 강등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 합병은 1935년에 양 클럽이 다시 분리되어 경기를 치르면서 종료되었다.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선수 중 일부는 아틸리오 두카 (라누스 역사상 291경기로 최다 출전 선수)였다. 1939년, 공격수 루이스 아리에타가 클럽에 합류하여 첫 시즌에 31골을 기록했다. 아리에타는 또한 1943년 앙헬 라브루나(리버 플레이트)와 라울 프루토스(플라텐세)와 함께 득점왕을 차지했다. 아리에타는 나중에 라누스의 역대 최다 득점자(120골)가 되었다.
라누스는 1949년까지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머물렀지만, 협회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으로 강등되었다. 토너먼트가 끝날 무렵, 보카 주니어스는 꼴찌, 라누스는 꼴찌에서 두 번째를 기록했다. 12월 8일, 보카가 라누스를 5-1로 대파했으며, 우라칸과 함께 최하위를 기록했다. 강등 팀을 결정하기 위해 라누스와 우라칸은 강등전을 치러야 했다. 우라칸은 첫 번째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했고, 라누스는 두 번째 경기에서 4-1로 설욕하여 세 번째 경기가 치러졌다. 3-3의 부분 점수에서 심판은 라누스에게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우라칸 선수들은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경기장을 떠났고 경기는 중단되었다. 아르헨티나 협회는 우라칸을 처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기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네 번째 경기에서 심판은 우라칸이 3-2로 앞서고 있는 동안 라누스에게 페널티킥을 선언하지 않았다. 그 결과 라누스 선수들은 (상대팀이 이전에 했던 것처럼) 경기장을 떠났다. 그러나 협회는 라누스를 처벌하여 클럽을 프리메라 B로 강등시키기로 결정했다.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몇 차례 부진한 성적을 거둔 후, 라누스는 1961년에 강등되었다. 팀은 24개 팀 중 12위를 기록했지만, 지난 3번의 챔피언십(1959, 1960, 1961) 동안의 평균을 계산하는 리그 시스템으로 인해 로스 안데스와 함께 강등되었다.[14]
3년 후 라누스는 프리메라 B 타이틀을 획득하며 프리메라 디비시온으로 복귀했다. 팀의 두 공격수 마누엘 실바와 베르나르도 아코스타는 함께 펼치는 유명한 "벽 패스"로 인해 곧 인정을 받았으며, "''"로스 알바닐레스"("건설 노동자")''"라는 별명을 얻었다.[15]
1966년, 클럽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선수 중 한 명인 엑토르 기디가 축구계를 떠났다. 3년 후 아코스타는 세비야로 이적하게 된다. 마누엘 실바는 1970년 그의 새로운 클럽인 뉴웰스 올드 보이스로 이적하며 ''알바닐레스'' 시대는 막을 내렸다. 같은 해, 팀은 "토르네오 레클라시피카토리오"에서 7개 팀 중 7위를 기록한 후 우니온 데 산타페와 함께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16]
1971년 기디가 감독이 되었고, 라누스는 프리메라 B에서 새로운 시즌을 시작했다. 팀은 2부 리그에서 새로운 타이틀을 획득하고 프리메라 디비시온으로 승격하는 훌륭한 캠페인을 펼쳤다. 라누스는 총 28경기를 치러 17승 4패를 기록했다. 스쿼드는 68골을 넣고 31골을 실점했다.[17] 불행히도, 클럽에게 1972년 프리메라 디비시온 시즌에서의 라누스의 재임 기간은 역사상 최악이었고, 챔피언십 종료 시 다시 강등되었다.
2. 3. 위기와 재건 (1978-1990)
1978년, CA 라누스는 약 200만달러의 빚을 지며 역사상 최대의 경영 위기에 빠졌지만, 소시오(클럽 회원)들의 지원으로 빚을 갚고 2부 리그로 복귀했다. 당시 소시오의 수는 겨우 2000명이었다. 1981년에는 소시오의 수가 1만 명을 넘었다.1984년, 라누스는 1부 리그 승격 플레이오프 준결승에서 라싱 클럽과 맞붙었다. 1차전에서 라싱 클럽은 라누스를 2-0으로 이겼다. 인데펜디엔테의 경기장에서 열린 2차전에서 심판은 라누스의 골을 무효로 처리하고 라싱 클럽에 논란이 많은 페널티킥을 주었다. 라싱 클럽은 골을 넣었지만, 경기는 라누스 팬들 때문에 중단되었다. 며칠 후 아틀란타의 경기장에서 재개된 경기에서 라누스는 경기를 지배하고도 2-1로 뒤졌다. 심판 에밀리오 미시치는 규정 시간 종료 5분 전에 실수로 종료 휘슬을 불었다. 라싱 클럽 선수들은 이미 축하를 시작했고, 심판은 그 핑계를 대며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라누스는 다시 한번 심판의 실수로 불이익을 받았고, 결국 시리즈에서 패배하여 1부 리그 승격에 실패했다.
1986년, 미겔 앙헬 루소 감독 체제에서 라누스는 13년 만에 1부 리그로 복귀했다. 팀 골키퍼 알시데스 에레라 덕분에 팀은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에서 킬메스를 꺾었다. 클럽은 또한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경기장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누스는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프리메라 B 나시오날 (1986년부터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클럽 임원들은 강등에도 불구하고 미겔 앙헬 루소를 감독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1990년, CA 라누스는 12년 만에 프리메라 디비시온으로 복귀했다.
2. 4. 부활과 영광 (1990-현재)
1990년, CA 라누스는 데포르티보 마이푸를 2-0으로 꺾고 1991–92 프리메라 B 나시오날 우승을 차지하며 1부 리그로 복귀했다. 이 경기는 3만 명 이상의 팬들이 지켜봤다.[13] 1993년, 팀의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코파 CONMEBOL에 처음으로 참가했지만, 8강에서 탈락했다. 아리엘 이바가사와 우고 모랄레스는 팬들에게 칭찬받는 미드필더 듀오였다.1995년, 엑토르 쿠퍼 감독 부임 후 라누스는 리그 3위를 기록했다. 1996년은 클럽 역사상 중요한 해였다. 클라우디오 엔리아 등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고, 코파 CONMEBOL에서 우승하며 첫 국제 대회 타이틀을 획득했다.[19] 결승전에서 콜롬비아의 인디펜디엔테 산타페를 합산 점수 2-1로 꺾었다.[19] 1997년에도 같은 대회 결승에 진출했지만,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 패했다.
1998년, 라누스는 벨레스 사르스필드에 이어 리그 2위를 기록했다. 2002년에는 강등 플레이오프를 통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잔류했다. 2003년에는 경기장 보수 공사가 완료되었다. 2006년, 유소년 선수들 중심으로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다. 2007년, 코파 수다메리카나에 2회 연속 진출했고,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도 처음으로 진출했다.
2007 아페르투라에서 라누스는 보카 주니어스와 1-1로 비기며 창단 후 첫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20] 산드는 15골로 득점왕을 차지했다.[20] 2008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16강에서 탈락했지만, 2011년 리그에서 다시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3년, 라누스는 코파 수다메리카 결승에서 폰테 프레타를 꺾고 두 번째 국제 타이틀을 획득했다.[23] 2016년, 프리메라 디비시온 결승에서 산 로렌소를 4-0으로 꺾고 두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24] 주니어 베니테스, 미겔 알미론, 호세 산드, 라우타로 아코스타가 득점했다.[24]
2017년, 2017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결승에서 리버 플레이트를 합계 4-3으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지만, 그레미우에게 패했다. 2024년 10월,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는 1955년에 라누스가 우승한 후안 도밍고 페론 컵을 공식화하여, 라누스는 총 7개의 공식 타이틀을 보유하게 되었다.[26][27][28][29]
3. 유니폼
1928년 CA 라누스 클럽 회장은 아르헨티나의 다른 클럽에는 없는 독창적인 유니폼을 찾기 위해 이사 한 명을 유럽으로 파견했다. 그 이사는 암적색 유니폼을 가지고 돌아왔고, 클럽 간부들이 매우 마음에 들어 해 팀 컬러가 암적색으로 결정되었다.[33]
4. 라이벌
라누스의 가장 큰 라이벌은 CA 반피엘드이다. 이 경기는 클라시코 델 수르(남부 더비)라고 불린다.
5. 우승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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